얼마 전 대화 중에 옛날에 읽었던 그림책 얘기를 했는데 내 기억에 있는 그림책은 예전에 학급문고로 있던 동화책 홍당무였다. 뭔가 놀림받고 구박받으면서도 귀여운 캐릭터라는 기억만 어렴풋한데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후로 잊고 있었는데 퍼뜩 생각나서 밀리에서 찾아보니 당연하게도 그때랑 같은 동화책은 아니지만 바로 내 서재로!
시공주니어에서 출판된 완역본이다.
다 읽고 짤막한 후기를 쓰자면 동심파괴… 옛날에 내가 읽었던 건 다이제스트도 아닌 그림책 수준이었어서 이런 잔혹한 표현들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동학대랑 에피소드 수위가 너무 심했다… 기억+책 읽으면서 생각난 장면으로는 혼자 집 밖으로 나온 홍당무가 가족들이 있는 밝은 집 안을 슬픈 표정으로 보던 장면, 토끼장 안에 들어가서 멜론(내가 읽었던 책은 참외였던 것 같다)을 같이 먹던 엉뚱한 장면, 들판에서 잔디를 뜯어먹는 장면이 있는데 그렇게 귀엽게 봤던 동화가…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학대
‘르픽 부인은 막내아들을 홍당무라고 불렀다. 빨간 머리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기억상에는 형이 얄미웠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가정폭력의 주체는 다름 아닌 어머니ㅠㅠ
- 잠자는데 옆에서 코 곤다고 꼬집어서 깨움
- 잘 때 문 밖에서 잠그고 요강 안 갖다 줘놓고 애가 마려워서 실수하면 면박줌, 요강 없었다니까 네가 거짓말하는 거라면서 몰래 갖다 둠
- 밤에 오줌지린걸 수프에 넣어서 먹으라고 줌;;
- 형, 누나에게는 그럭저럭 잘 대해주면서 홍당무에게 유독 박하게 대함
- 온갖 말로 홍당무 통제하고 폄하하고 뺨 때림
어머니의 괴롭힘이 유치하고 악의가 느껴지는데 동네사람들도 알고 있고 그러면서 홍당무를 말썽쟁이라면서 같이 비웃기도함. 아버지는 와중에 홍당무가 힘들어하는 거 모름. 그런데 또 르픽 부인이 홍당무를 진짜 막 싫어하고 학대만 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게, 홍당무 실수로 낚싯바늘에 손 꿰였을 때는 괜찮다고 위로해 준다거나(물론 이때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랬을 수 있음) 다른 사람들이 홍당무 괴롭히는 건 또 저지함.
‘르픽 부인은 바구니를 들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홍당무가 올챙이를 잡을 수 있도록 가득 담겨 있던 호두를 일부러 쏟아 내고 가져왔던 바구니였다.’ 이런 장면도 있는데 아니 이때는 왜 잘해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처음에는 놀러 가지 말라고 했다가 바구니는 또 비워서 갖고 와줬다가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거 보고 또 가지 말라고 함;; 왜?? 자존심 상해서? 다 읽어도 애를 왜 이렇게 싫어하고 학대하는지 모르겠음. 심지어 애 셋을 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홍당무만 유독 박하게 대함. 작가인 쥘 르나르가 형누나가 있었단 점을 고려하면 엄마가 똑같이 무뚝뚝한 성격이어도 어릴 때의 기억으로 형, 누나에게는 잘해주고 나한테만 유독 못살게 구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이해력과 상상력을 발휘해 보지만... 극적인 연출을 위해 르픽부인이라는 캐릭터를 더 악독하게 표현했다고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어머니한테서 저런 취급을 받은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홍당무의 잔악성
그런데 또 홍당무가 그저 순수하고 너무너무 착하고 여리기만 한 애냐면 그것도 아님.
쥘 르나르는 1890년에 쓴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아이를 천사로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잔인하고 사악한 면을 지니고 있다.’ 쥘은 《홍당무》를 통해 어린이는 악덕과 미덕을 동시에 지닌 복잡한 인격체임을 보여 주려고 했다.
서문에 나오는 내용인데 홍당무의 잔인한 면이 보이는 고양이를 엽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 사냥 묘사 일부, 두더지 패대기치면서 죽이는 장면 다 너무 크리피해서 호러소설만큼 무서웠다.
홍당무는 다른 유리창마저 깨뜨리면서 소리쳤다.
“빌어먹을! 왜 쟤한테만 뽀뽀해 주고, 나한테는 안 해 주는 거예요?”
홍당무는 베인 손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내 뺨도 이렇게 빨개질 수 있다고요!”
기숙학교 안에서 예쁨 받는 친구를 질투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진짜 충격적이었다. 애정결핍으로 비뚤어진 게 너무나…
홍당무가 완전무결하게 순수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안쓰러운 이유는 부모님 눈치 보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행동하는 모습, 멜론 좋아하는데 티 안 내고 혼자 몰래 토끼 밥으로 버리는 부분에서 과육 갉아먹는 모습(하 눈물 나…)들에서 사랑받기 위해서 혼자 애쓰고 체념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후회가 슬슬 밀려오고 있다.
홍당무는 가슴이 아파 올 순간을 기다렸다.
쓸쓸한 데다 저항할 생각도 없어진 홍당무는 그 괴로운 순간이 다가오도록 내버려 둘 셈이다.
스스로 불러온 벌을 달게 받으려는 것이다.
아이가 친구랑 놀고 싶어 하는 게 죄냐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아이가 저렇게 느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홍당무의 성장
홍당무는 르픽 부인이 없으면 자기 의견을 술술 풀어놓는다.
“제 생각에 가족이라는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빠, 제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 하지만 아빠가 제 아빠라서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아빠가 제게 친구 같은 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죠. 사실 아빠는 제 아빠로서는 좋은 아빠라고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전 아빠의 애정을 굉장한 은혜로 생각해요. 아빠는 제게 그런 애정을 줄 의무가 없는데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잖아요.”
르픽 씨가 대답했다.
“오호!”
펠릭스 형과 에르네스틴 누나가 물었다.
“그럼 난? 난 어때?”
“마찬가지야. 형과 누나가 내 형과 누나가 된 건 순전히 우연이잖아. 그것에 대해 내가 감사할 이유는 없지. 우리 셋이 르픽 집안에 태어난 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잖아. 형과 누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 뜻에 상관없이 형제가 된 것에 대해 감사할 필요는 없어. 난 형이 내 형이라서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형이 나를 지켜 주기 때문에 고마워하는 거야. 누난 날 잘 돌봐 주니까 고맙고.”
이 장면에서 홍당무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엄마는 홍당무를 학대하고 고약하게 구는 존재이기 때문에 홍당무도 엄마를 사랑하지 않고 애정을 갖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나?
내 의지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이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어린이가 완전한 인격체로 자라나려면 부모의 사랑과 이해가 가장 필요하지만, 홍당무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어떤 행동을 해도 엄마의 가혹한 꾸지람만 돌아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당무는 조금씩 성장한다. 그리고 작품 끝 무렵에서 마침내 엄마의 불합리한 행동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 준다. 이렇듯 쥘 르나르는 어린이를 새로운 인물로 창조한 것은 물론,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어려움에 맞서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려 냈다.
마지막 부분에서 르픽부인의 심부름을 거부하고 반항함으로써 홍당무의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지고 성장했음을 보여주지만, 그 후에 아버지랑 둘이 대화하는 장면은 또 사이다장면은 아니었다.
르픽 씨 : 하지만 넌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니. 그러니 진심으로 그럴 생각은 없었던 거야. 그런데 넌 자살할 뻔한 일을 꽤나 자랑스럽게 말하는구나. 죽으려고 한 사람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는 줄 아니? 홍당무야, 그런 이기적인 생각은 너를 망친단다. 넌 지금 이불을 혼자만 덮겠다고 네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거야. 세상에 너 혼자밖에 없는 줄 아니?
애가 자살 생각까지 했다니까 대답하는 꼬라지가 가관. 아버지가 이해자 역할인데 그마저도 이 꼬라지임. 아버지보다 대부가 훨씬 나음. 대부는 홍당무가 학대당하는 걸 알고 있고 가엾게 여기는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름… 이런 가정환경 또한 홍당무가 헤쳐나가야 할 시련이겠지
홍당무의 의미
르픽 씨 가족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농촌에 살고 있는 ‘부유하지 않은’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다.
쥘 르나르가 살던 시대에는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사실주의 문학이 크게 유행했다. 쥘은 특히 시골에 사는 중산층 계급의 허위적인 삶을 그린 소설가 모파상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도 《홍당무》를 통해 19세기 프랑스 중산층 가정의 생활 모습을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려냈다. 《홍당무》는 쥘 르나르의 문학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자,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훌륭한 본보기로 평가받는다.
홍당무가 유명한 고전명작인 이유는 이렇다고 합니다. 1894년 작품이라는데 내가 130년 전 프랑스 감성이랑 안 맞나 봐…. 사실적이어도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소년의 상황은 참혹하고 명쾌한 결말을 기대할 순 없음. 아이의 성장물로서의 의미와 당대 프랑스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성과 상징성은 알겠고 이런 게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쓸쓸해지기도 하는데 이걸 동화책으로 만들어서 미취학 아동 또는 초등생에게 읽혀야 할 레벨인지는 모르겠다.
세상에 화목한 가정만 있는 게 아니고 실제로 가정 내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으며 그런 상황에 있다면 부모에게 반발하고 가정에서 분리되는 것도 하나의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어른은 안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라는 존재가 굉장히 충격이고 비정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의 아이에게 홍당무라는 작품이 어떤 위로와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작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대부/아버지)에게 이해받을 수 있고 나도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거역할 수 있다는 메시지 같은? 어머니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나름의 이해자를 찾으며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 우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학대당하고 있다면 나의 힘으로 부수고 나갈 수 있다?
내가 어릴 때 동화책으로 읽기도 했고 고전 명작으로 많이 출판되어 있어서 홍당무가 아동문학으로써 가질만한 의미를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다. 아동문학으로서의 조건이 있는 걸까? 아동이 읽는 책이라고 밝고 희망적인 내용만 담겨야 하는 건 아닐 테지만 아동이 홍당무 원작을 보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이 읽기엔 표현이 너무 잔인한 것 같다…
대체 이 내용을 동화로 만들었을 때 어떻게 전개하고 결론지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유튜브로 동화 낭독한 걸 보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랑 얘기하면서 ‘네가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겠지’, ‘앞으로는 그러지 말렴’ 하고 가스라이팅하면서 끝나는데 이게 맞는 거? 본질을 완전히 바꿔놓는데? 학대당하는 아이에게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그럴만해서 그랬겠지 하는 게?? 진심으로 경악스러웠다. 이런 얄팍한 교훈식 결말; 홍당무라는 작품의 본질을 그냥 아예 지워버렸는데… 작품 의미를 퇴색시키고 입맛에 맞게 바꿔버리는 최악의 방식. 차라리 창작동화를 만들라. 고전 작품을 저작권 만료된 프리소스쯤으로 보지 않고서야 이렇게 각색할 수는 없다. 고전 읽을 때 요약판 읽지 말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봤지만 ‘뭐 기승전결 내용만 알면 되는 거 아니야?’ 싶었는데 진짜 그건 아닌 듯. 고전 애호가도 아니고 많이 안 읽어봤지만 앞으로 요약본으로는 못 읽겠다…
홍당무 읽고서 내 기억이랑 많이 달라서 충격인 것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생각과 의문에 밤잠 설쳤다가 동화버전이 너무 어이없어서 길게 포스팅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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